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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11월 07일
[외전] 라크시미 -고향이라는 이름
나의 재능있고 아름다운 딸 라크시미. 나의 딸아. 나는 지금 너에게 작별인사를 하고자 한다. 그러니 부디 나의 이야기를 헛되이 흘러내리는 저 빗방울처럼 여기지 말고 기억해두거라. 네가 요즘 심취해있는 정열적인 이탈리아 화가 에밀리오의 붓끝을 바라보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귀를 기울여다오. 방랑이라는 것은 몸에 배인 향수 냄새와 같은 것이다. 그래, 내가 언제나 애용하고 있는 페리엘리스의 우아한 향처럼 말이지. 그 향기로운 향취가 이제는 나의 일부가 되었듯이, 방랑도 영혼의 갈증을 해소하는 존재가 된지 이미 오래다. 그리고 이미 정처없는 부유에 넋을 잃어버린 나로서는 강하게 이끄는 그 유희에서 내 영혼을 구출해낼 방법을 도무지 알 수 없구나. 딸아. 그러나 나그네는 여행을 마치면 반드시 귀향을 하는 법이다. 비록 오랜 방랑 끝에 다시 찾은 고향의 아름다운 정경에 금새 염증을 내고 곧 정처없는 발길을 돌릴지언정, 나그네는 언제나 귀향을 꿈꾸기 마련이고, 그러다가 여정 도중의 갑작스런 향수에 괴로와하며 그리운 집으로 돌아오는거다. 나의 짧은 인간이었던 시절을 보낸 곳은 조용한 영지의 아름다운 저택이었다. 전쟁으로 위의 형 넷을 모두 잃고 이어받은 백작의 작위는 나의 꿈을 부수고 숨통을 틀어쥐었으나,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그곳은 정녕 아름다운 저택이었다. 그곳이 너를 만나기 전까지는 나의 고향이었지. 녹색의 평원과 아름다운 산지의 고요하고 평화로운 땅이다. 그래, 언젠가 너도 가보는 것이 좋겠군. 그곳은 아직도 아름다운 정원을 가지고 있지. 라크시미, 그 정원은 불꽃같은 열정을 가진 너라 해도 마음에 들거라 믿는다. 그러나, 라크시미. 아름다운 내 딸아. 기억해두거라. 내가 돌아갈 고향은 내 영지의 저택이 아니라, 라크시미, 네가 있는 곳이다. 검은 밤하늘 가운데 영롱하게 빛나는 별을 바라보며 내가 그리워하는 것은 그 푸른 정원에 둘러싸인 백색의 저택이 아니라, 검은 진주와도 같이 우아한 광택을 발하며 빛나는 너의 검고 깊은 눈동자이다. 그 옛날 인도의 왕궁 깊은 곳에서 매끄러운 비단을 몸에 감고 날 올려다보던, 천진한 미소와 놀라운 재능을 가진 검은 진주를 발견한 이후부터, 너는 나의 뛰지 않는 심장을 대신하는 존재가 되었다. 오오.. 나의 딸아. 그렇다면 어째서 또 다시 떠나려 하는 것이냐며 아름다운 입술로 나를 질책하는구나. 허나 방랑은 나의 목마른 영혼의 갈증을 해소할 유일한 방도이다. 영혼의 갈구와 심장의 존재는, 안타깝게도 나에게는 둘 다 포기할 수 없는 성질의 존재이다. 혹자는 나의 떠돌이 생활에 대해 어째서 강그렐이 아니라 토레도인지 알 수 없다고 비웃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아름다움을 감상하는 방식을 이해하지 못하기에 할 수 있는 언사이다. 아무리 아름다운 보석이라 해도 늘 곁에 두고 있으면 그 진정한 아름다움을 깨닫지 못하는 법이지. 하물며 매일 같은 보석이라면 그 아름다움과 가치는 잔인하게도 지겨운 것이 되어버린다. 너를 발견한 것과 같이, 정처없는 내 발길이 우연히 머문 곳에서 뜻하지 아니했던 다이아몬드를 발견해낸 기쁨을 무엇과 비교할 수 있을까. 딸아.. 그러니 이제 그만 나의 뛰지 않는 차가운 심장을 찢어놓는 피눈물을 거두고 그 아름다운 팔로 나를 환송해다오. 우리의 삶은 짧지 않으니 나의 방랑은 반드시 너에게로 이어질 것이다. 사랑하는 나의 딸 라크시미. 이제 그만 나를 보내다오. 나의 대부는 언제나 정처없이 떠돌아다니는 자다. 그의 푸른 눈동자는 나와 함께 있을 때에도 언제나 허공을 바라보며 자유로운 바람을 부러워했다. 그가 과연 진실로 나를 사랑하는 것인지는 확신할 수 없으나 언제나 여행의 끝은 나에게로 돌아오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가끔 나는 생각한다. 그가 나의 대부가 된 것은 돌아갈 곳이 필요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고. 아름다운 곳이라고 언제나 입버릇처럼 자랑하지만, 반가이 맞아주는 자 하나 없는 영국의 저택이 아니라, 세월을 죽이며 오매불망 자신만을 기다리는 존재가 필요했던 것은 아닐까 하고. 나는 반쯤의 확신을 가지고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비록 그것이 진실이라 해도, 나는 그가 돌아올 것을 의심치 않기에 차가운 침대에 몸을 누이고 그를 기다리는 것이다. 그가 말한대로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무한정하고 내가 그의 귀향을 바라므로 이번에도 나는 그를 기다리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움직이지 못하는 영국의 저택이 아니다. 나는 내 의지를 가지고 그를 떠날 수도 있으며, 기다리는 일이 반드시 내 몫인 것만도 아니라는걸 나의 대부는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이제는 내가 더 이상 여왕이 아니듯.. 더 이상 그의 것이 아니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그는 알아차려야 한다. 오늘도 나는 그런 생각을 품고 그의 귀향을 기다리고 있다.. 리야르의 전투는 벌써 한달에 걸쳐서 지속되고 있었다. 인도군과 영국군은 지리한 소모전을 하고 있었고, 그것은 영국군에 비해 보급이 거의 없는 인도저항군의 사기를 빠른 속도로 떨어트리고 있었다. 자신의 막사에서 피곤한 몸을 누인 라크시미는 부상으로 인한 열로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며칠전 한 영국병사가 쏜 총에 맞은 그녀는 바로 그 자리에서 단검으로 상처를 째고 총알을 뽑아내는 기염을 토해내 인도군의 사기를 드높이기는 했지만, 단적으로 말해서 그건 미친 짓이라는걸 본인 스스로가 잘 알고 있었다. 더러운 단검으로 짼 상처가 곪아들어가고 있다는 점만으로도 충분히 입증될 일이었다. 잠자는 것을 포기하고 상체를 일으킨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옆구리 상처를 내려다 보았다. 아마도 내일 있을 전투에서 그녀의 저항군 부대는 패퇴하고 그녀는 목숨을 잃을 것이다. 자명한 일이었다. 그녀의 얼마 남지 않은 군대 전체에 퍼져있는 이 시커먼 기운은 패전과 죽음의 두려움이다. 잔시의 자유와 독립을 위한 투쟁이란 것은 이미 소원한 목표였고, 그녀는 물론이고 그녀의 군대도 그것을 매우 잘 알고 있었다. “유모가 보고 싶군.” 저도 모르게 작게 중얼거린 그녀는 유모의 흑갈색 얼굴을 떠올리면서 미소지었다. 유모는 스스로 ‘마법의 재료’ 라고 이름붙인, 열몇 가지의 향신료를 조합한 독특한 향의 향신료로 카레를 만들어주곤 했었는데, 그 깊은 향은 아무도 흉내낼 수 없는 그녀만의 비법이었다. “하지만 유모는 죽은지 이미 오래지.” 라크시미는 잠시 한숨을 삼키며 한참을 가만 누워있다가, 힘겹게 몸을 일으켜 막사 밖으로 나갔다. 살아남은 병사들은 태반이 부상자들이었다. 내일 이들은 모두 죽을 것이다. 자신까지도. 그녀는 그들을 바라보며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최소한 저 병사들만이라도 살아서 고향에 돌려보내줄 수 있다면.” “그게 여왕으로써의 마지막 소원입니까? 진정으로 원하신다면 들어줄 수 있습니다만.”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흠칫 놀란 그녀가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고통 속에서 신음을 흘리고 있는 병사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의아함에 고개를 갸웃한 그녀가 막사 안으로 들어서자 어두운 막사 안에 사람 그림자가 하나 서있었다. “누구냐!” “목소리를 낮추시지요. 적이 아니니. 여왕과의 거래를 위해 찾아온 자일 뿐입니다.” 낮은 목소리로 대답한 그림자가 천천히 움직이며 한구석에 있는 램프에 불을 붙였다. 기름이 타면서 검은 그을음이 약간 피어오르고 흐린 빛이 막사안을 비추었다. 그리고 그 빛 속에서 여인들이 입는 검은 사리로 전신을 가리고 서있는 자가 있었다. 그녀가 의아한 눈동자로 바라보는데 그는 얼굴을 감싸고 있는 검은 베일을 내리며 고개를 들었다. “레..레스터? 어떻게 이곳에..!” 어린 시절의 그녀의 스승이었던 레스터. 그러나 그는 영국인이다. 평화로웠던 시절과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하물며 지금 그녀의 군대가 대치하고 있는 적군은 영국군 아니던가? 그녀는 기가 막혔다. “지금 제정신인가! 어떻게 감히 이곳에 숨어들어올 생각을!” 레스터는 파르르 떨며 낮게 외치는 그녀를 내버려둔 채, 머리를 꽁꽁 싸매고 있는 베일을 푸는데에 여념이 없었다. 마침내 흐릿한 기름등불빛에 곱슬거리는 백금발이 모습을 드러내자 그는 한숨을 내쉬며 그녀의 침구가 놓인 카펫 위에 우아한 몸짓으로 앉았다. 그리고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네가 감히 지금 누구의 안전이라고....!” 그녀가 그의 무례한 행동에 분노하며 호통을 치려는데. 그의 푸른 눈동자가 묘한 빛을 발한다 싶은 순간, 경악스럽게도 그녀의 몸은 의지와는 달리 그에게 다가가 손을 잡는 것이었다. 그는 빙긋 웃으며 그녀의 손을 끌어당겨 곁에 앉히고는 치욕스러움에 몸을 부들부들 떠는 그녀의 이마에 키스했다. 라크시미는 너무 기가 막힌 나머지 총상의 통증도 잊고 그의 따귀를 철썩! 올려붙였다. “나는 여왕이니라! 이제 더 이상 너를 흠모하던 철없는 어린 시절의 내가 아니다!” “철없는 어린 시절이라 하셨습니까?” 그의 얼굴이 진지해졌다. “그 철없는 어린 여자아이에게 모든 정신을 빼앗겨버린 채 이 순간을 기다려온건 저입니다만.” “....내 노예들 중 얼굴이 좀 반반하다 싶은 것들은 모조리 건드리고 갑자기 사라져버린 자가 할 말은 아니라고 보는데. 왕께서 아셨으면 당장에 네 목을 치셨을 것이다.” “미를 찬양하고 탐하는 것은 죄악이 아닙니다. 저는 단지 아름다움에 잠시 취했을 뿐. 그때도 지금도 진심으로 가지고 싶은 것은 당신입니다, 여왕.” “여왕은 네가 소유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여왕이라 해도 죽음은 피해가실 수 없습니다. 오직 받아들이기만 할 뿐.” 빙긋 웃는 그의 말에 라크시미의 눈이 커졌다. “네가 지금 감히 여왕시해를 입에 올리는게냐!” “그저 진실을 알려드린겁니다. 자..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만. 여왕으로써의 마지막 소원을 이루시길 바라십니까? 바라신다면 그것을 현실로 만들 힘이 제게는 있습니다.” 허튼 소리 하지 말라고 소리를 지르려던 라크시미는 마음을 가라앉히며 차분히 생각에 잠겼다. 어린 시절 레스터는 그녀에게 단순한 흠모의 대상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신비한 미모 이전에 정체를 알 수 없는 기묘한 분위기. 예술가는 어둠의 노예라며 낮에는 잘 나오지 않던 이 아름다운 남자에게는 왕족인 그녀로서는 용납하기 힘든 압도적인 무언가가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궁금했었지. 네 정체는 무엇이냐.” 조용한 그녀의 물음에 레스터는 빙긋 미소를 지었다. “여왕께서는 이해하지 못하실겁니다. 직.접. 겪어보시지 않는 한.” “네게 진정 그런 힘이 있다는 것을 내가 어찌 믿느냐. 너는 그저 내 어린 시절의 그림선생 아니더냐? 또한 대가로 무엇을 원하는게냐. 나는 이미 나라를 잃어버린 여왕. 조국이 짓밟혔음을 인정하지 못하여 몸부림치고 있는 패망국의 여왕일 뿐이니라. 나는 너에게 대가로 줄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 “제게 그럴 힘이 있다는 것은 총명하신 여왕이시니 이미 깨닫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리고 대가로 바라는 것은 여왕 당신입니다. 저는 당신의 아름다움과 뛰어난 재능을 모두 가지기를 희망합니다.” 그가 부드러운 어조로 대답하면서 품안에서 낡은 두루마리 하나를 꺼냈다. 받아서 펼쳐보니 그녀의 그림이었다. 라크시미는 어리둥절한 얼굴이 되었다. “그 어린 날의 시절부터 지금까지 참으로 길었습니다. 여왕이 가장 아름답게 피어나는 시기를 기다리는 것 외에도 이런저런 준비가 필요했었지요. 당신은 직계왕족인 동시에 여왕이고, 또한 이곳의 프린스는 우리의 프린스도 아닙니다. 게다가 아름다운 여왕은 그 그림처럼 놀라울 정도의 재능도 가지고 있기에, 당신을 탐내는 토레도는 이곳에도 있습니다. 덕분에 당신을 얻기 위해서 내가 치루어야 했던 대가는 작은 것이 아니었지요.” 그녀는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얼굴을 한 채 눈살을 찌푸렸다. 그런 그녀를 보고 레스터는 빙긋 웃으면서 말했다. “아직은 이해하지 못하셔도 상관없습니다. 무엇보다 지금은 그것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을텐데요?” “여왕으로써의 마지막 소원.. 말인가.” “한 때나마 스승이었던 정리를 생각해서 여왕을 가지는 대가로 한가지 정도 힘이 되어드릴 수도 있습니다. 자.. 여왕은 저들을 살려서 고향으로 돌려보내시길 바라셨습니다. 진심이십니까? 그 행동이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도 아시는지요?” 레스터의 눈이 고요하게 그녀의 검은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라크시미는 무릎을 끌어안으며 낮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어차피 돌아가봤자 저들에게 조국은 남아있지 않다- 이 말인가? 그러나 가족은 남아있다. 나와는 달리.” “그것도 틀린 대답은 아니긴 합니다만, 부족합니다. 여왕은 저 밖에 누워있는 자들의 입장을 생각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내일 전투가 시작되면 당신은 물론이고 저들은 모두 죽을게 확실합니다. 그렇기에 다친 몸이라도 가족들의 품으로 돌려보내고 싶다는 생각이 들만도 합니다. 그러나 그 생각을 저들은 안했을까요?” 그 물음에 라크시미는 흠칫하고 얼굴을 굳히며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레스터는 여전 미소지은 채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갔다. “저는 토레도입니다. 아니, 그게 무엇인가는 차차 알게 되실터이니 지금은 그저 제 말을 들으세요. 그래요. 저는 토레도입니다. 토레도는 인간을 존중하며 그들의 생각과 의견을 이해하려 애쓰는 자들이지요. 때문에 다른 혈족들에 비해서 인간들을 좀 더 잘 압니다. 그리고 저 역시 언제나 인간들과 어울려 지내면서 그들을 이해하려 애쓴다는 점에서만은 전형적인 토레도입니다. 그렇기에 저들의 생각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왕, 그러나 당신은 인간입니다. 저보다 더 잘 이해하고 계실텐데요, 저들의 지금 심정을.” 그는 라크시미의 눈동자에서 시선을 떼지도 깜박이지도 않으면서 조용조용하게 말했다. “여왕. 대다수가 부상자인 당신의 군대는 이곳에서 당신과 함께 죽을 각오를 한 겁니다. 아무리 부상자라 해도 일어설 수 조차 없는 자의 수는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고통과 두려움 속에 신음하면서도 누구 하나 이곳을 떠나는 이가 없습니다. 당신들의 조국 잔시의 독립은 이미 요원한 일. 내일 그들은 여왕과 함께 마지막까지 적과 싸우며 항거하였다는 자랑을 가슴 속에 품고 죽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여왕. 당신의 소원은 그런 저들의 소망을 완전히 무시하시는 처사입니다. 정녕 저들의 무사귀환이 여왕의 소원인겁니까?” “..........” “잘 생각해보세요. 나는 그럴 수 있는 힘이 있기 때문에 여왕이 원하시면 그 소망은 ‘현실’이 됩니다. 진심으로 원하십니까?” 라크시미는 그의 사파이어처럼 새파란 눈동자를 멍하고 바라보고 있었다. 가까이에서 보니 속눈썹이 길게 드리워져 있었지만 하얗고 투명한 재질 때문인지 빛을 대부분 투과시켜 눈동자에 진한 그늘은 드리우지 못하고 있었다. 이 자는 정말 인간이 아니군- 갑작스러운 깨달음과 함께 그녀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조금전 나는.. 나의 유모를 생각하고 있었다.” 어쩐지 목이 메이는 기분. “아주.. 아주 늙은 여자였고.. 나뿐 아니라 나의 어머니도 키워낸 여자였다. 그녀의 자랑하는 요리는 바로 카레였는데.. 그녀 외에는 아무도 만들 수 없는 향의 카레였다. 그녀는 그 향을 내는 향신료를.. 마법의 향이라고 부르면서 아무에게도.. 그 누구에게도 그것을 만드는 방법을 알려주지 않았다.. 그리고.. 채 영글지도 못한 어린 나이에 왕비가 되어야했던 나에게 유모는.. 그 마법의 향이라는 향신료가 가득 담긴 단지를 안겨주었다. 유모가 그리워지면.. 내가 나고 자란 궁궐이 그리워지면.. 그것으로 카레를 만들라고 하면서.. 그 향이 퍼지는 곳이 바로 나의 고향이라고 하면서.. 그녀는 울면서 나에게 단지를 안겨주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잠겨있었지만 눈물은 흐르지 않았다. 어린 나이였을 때부터 여왕이었던 그녀는 많은 것을 참아오는 것에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에, 여왕에게 눈물은 허락되지 않은 것이었기 때문에, 그녀는 우는 방법을 잊어버린지 이미 오래였다. 눈물이란 것이 참아야 하는 존재가 아니라 흘릴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린지도 너무 오래전 일이었다. “오늘 나는.. 괴로워하는 병사들에게 마지막.. 식사로.. 그 마법의 가루를 모두 사용해서 카레를 만들어 주었다. 그것을 먹은 병사들은 모두 웃으면서 내게 말해주었지. 고향의 맛이라고.. 어머니가 만들어준 그 카레의 향이 난다고..” 눈물을 흘릴 수 없는 그녀의 몸이 가늘게 떨렸다. “그 말을 듣고서야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다. 나의 유모가 마법의 향이라고 했던 향신료는.. 사실 아주 흔한.. 너무나 흔해서 거의 모든 집에서 사용하는 향신료를 그녀 나름의 배합으로 섞어서 만들었던 것이었다. 그래서.. 그래서 카레를 좋아하는 인도인이라면 누구나 고향의 맛이라고 느끼게 만드는 묘한 힘이 있었던 것이었다. 그녀는.. 고향의 향기를 가진 여자였다.” 라크시미는 한숨을 내쉬며 덧붙였다. “그래서 나는 내 병사들에게 고향을 돌려주고 싶어졌던 것이다.” 돌아가고 싶었던 것은 그녀였다. 그러나 그녀는 여왕. 그녀에게는 허락될 수도, 아니, 떠올려서도 안되는 생각. 때문에 돌아갈 수 없는 자신 때문에 이곳에서 죽음을 선택한 자들만이라도 돌아가기를 바랬을 것이었다. 레스터는 그녀의 마음을 이해했지만 말하지는 않았다. 그 순간의 그는 토레도이면서도 너무나 전형적인 밤의 귀족이었다. 그와 상관있는 인간이 아닌 이상 누가 어찌 되든 자신과는 무관한 일. 지금껏 기다리며 희구해왔던 검은 진주를 손에 넣을 수 있다면 다른 자들은 알 바가 아니었다. 그가 아무리 토레도라 하더라도 인간이 아니다. 그에게 인간의 감정을 이해하는 것과 그것을 공감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그는 그녀의 떨리는 몸을 안으며 묘한 힘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여왕의 소원은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의 말이 잠시 끊어졌다가 묘한 위엄이 담긴 어조로 덧붙였다. “너는 이제 더 이상 여왕이 아니다.” 그 말을 끝으로 그는 그녀의 입술을 가졌고 그녀의 몸을 가졌고 그녀의 목을 가졌고 그녀의 모든 것을 가졌다. 그녀는 그의 것이 되었다. 다음날 리야르에 진을 치고 있던 영국군은 갑작스런 퇴각명령에 당황하면서 물러났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물러난 쪽은 영국군이었으나 역사는 영국군의 승리라고 기록했다. 그리고 그것에 의문을 품는 자도 없었다. 인도의 저항군 측 생존자들은 모두 고향으로 돌아갔으며, 그들 중 단 한명도 죽음을 각오했던 마지막 전투의 전날밤에 전장을 떠난 자신에 대해서 의구심을 갖지 않았다. 기묘한 일이었으나 아무도 그에 대해 의심을 하는 자는 없었다. |